
연말이 되면 유독 혼자라는 느낌이 선명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저도 그런 새해를 맞았습니다. 약속이 계속 미뤄지다 결국 혼자 12월 31일을 보내게 됐고, 그날 밤 틀어놓은 영화가 해피 뉴 이어였습니다. 아직 4월이지만 연말에 이 영화를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면, 제 경험이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하게 써봅니다.
혼자 맞는 연말, 어디서 위로를 찾을까
연말이 되면 SNS에는 모임 사진이 넘쳐나고, 주변은 다들 바빠 보이는데 정작 나만 일정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그해에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많이 느슨해진 상태였습니다.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조차 왠지 눈치가 보이고 망설여지던 시기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해피 뉴 이어를 보게 됐는데, 처음에는 그냥 배경처럼 틀어놓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화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영화 속 인물 중 15년 동안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소진의 이야기가 특히 박혔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오래 미루고만 있는 감각이 꽤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는 2021년 12월 29일에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로, 러닝타임은 약 138분입니다. 한지민, 이동욱, 강하늘, 임윤아 등 익숙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데, 그 캐스팅 자체가 연말 분위기와 잘 어울려서 영화를 켜는 것만으로 이미 절반은 따뜻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옴니버스 구조가 오히려 연말과 어울리는 이유
이 영화의 핵심 형식은 옴니버스(omnibus) 구조입니다. 옴니버스란 하나의 일관된 주인공 없이 여러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하나의 주제 아래 묶이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각 에피소드는 독립적이지만 동일한 공간인 엠로스 호텔에서 교차하며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이 구조가 영화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실제로 등장인물이 여섯 쌍에 달하다 보니 초반에는 이름과 관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집중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각 에피소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말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맞물리면서, 마치 다양한 사람들의 연말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감각이 생겼습니다.
옴니버스 형식이 연말 영화에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연말은 본질적으로 여러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계절입니다. 설렘과 외로움, 회고와 기대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시간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보다 오히려 여러 감정을 조각처럼 이어 붙인 구성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에피소드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소진(한지민)과 승효(김영광): 15년간 고백을 미뤄온 짝사랑의 이야기
- 용진(이동욱)과 이영(원진아): 호텔 CEO와 하우스키퍼의 신분 차이를 넘는 감정
- 재용(강하늘)과 수연(임윤아): 연속된 실패 끝에 삶의 의지를 잃어가던 청년의 회복
- 캐서린(이혜영)과 상규(정진영): 40년 만에 재회하는 중년의 첫사랑
- 이강(서강준)과 상훈(이광수): 브로맨스로 불리는 진심 어린 우정과 연대
- 세직(조준영)과 아영(원지안): 고등학생의 풋풋한 첫 감정
연말 영화가 건드리는 감정, 그 심리적 기제
연말에 감성 영화를 찾게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성찰(self-reflection)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성찰이란 자신의 경험, 감정, 행동을 내면에서 되짚어보는 인지적 과정으로, 연말처럼 시간적 경계가 명확한 시점에 특히 활성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연말에 회고와 관계 점검을 하는 경향은 심리학적으로도 유의미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은 '시간적 이정표(temporal landmark)'를 기점으로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다짐하는 경향이 강하며, 연말은 그 대표적 시점입니다.
해피 뉴 이어는 이 지점을 꽤 영리하게 건드립니다. 특히 재용과 수연의 에피소드가 그랬습니다. 재용은 5년간의 공무원 시험 실패와 이별이 겹쳐 삶의 방향을 완전히 잃은 인물입니다. 그를 되살리는 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수연의 담담한 말 한마디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로맨스 영화에서 이런 무게의 이야기를 다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영화 속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흐름을 말합니다. 해피 뉴 이어에서는 재용처럼 뚜렷한 캐릭터 아크를 보여주는 인물이 있는 반면, 일부 에피소드에서는 인물의 변화가 충분히 그려지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연말에 봐야 하는 사람과 기대치 조절법
해피 뉴 이어는 모든 사람에게 맞는 영화는 아닙니다. 저도 보고 나서 친구에게 추천을 했더니 "생각보다 심심했다"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그 반응이 다른 것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 밀도(narrative density), 즉 단위 시간 안에 사건과 갈등이 압축되어 있는 정도가 낮은 편입니다. 내러티브 밀도가 낮은 영화는 강한 자극보다 은은한 여운을 선호하는 관객에게 더 잘 맞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볼 때 기대치를 어떻게 세팅하느냐가 꽤 중요합니다. 극적인 반전이나 강한 감정 폭발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잔잔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거나, 주변 사람을 떠올리고 싶은 분위기라면 꽤 잘 맞아떨어집니다.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연말에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사람이 문득 생각날 때
- 강한 자극 없이도 감정이 살살 움직이는 영화가 보고 싶을 때
- 중년의 사랑이나 우정처럼 다양한 관계의 형태가 보고 싶을 때
국내 영화 관람 통계에 따르면 12월 말은 연간 영화 관람 비율 중 감성 드라마 장르 소비가 가장 높아지는 시기로 나타납니다. 그 통계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좀 더 실감했습니다.
제가 그날 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 일은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잘 지내?"라는 짧은 한 마디였는데, 생각보다 따뜻한 답장이 왔고 괜히 울컥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가 직접 그렇게 하라고 말한 건 아닌데,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게 이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해피 뉴 이어는 잘 만든 영화냐고 묻는다면, 구조적으로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연말의 딱 그 타이밍에, 딱 그 감정 상태에서 보면 예상보다 훨씬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이번 연말에 마음이 좀 싱숭생숭하다면, 혹은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사람이 한 명쯤 떠오른다면 한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그 사람에게 먼저 연락해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그것 또한 용기이니깐요.